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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2년 11월의 호국인물
작성자 전산부 등록일 2012-11-14 조회수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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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내물왕의 7세손으로 급찬(級飡) 구리지(仇梨知)의 아들이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그의 할아버지는 비량공(比梁公)이라고 한다. 사다함의 아버지 구리지는 담력이 크고 무예를 매우 좋아하였다. 사다함은 생김새가 맑고 깨끗하였으며 뜻과 기상이 방정하였다고 한다.
신라 진흥왕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화랑도를 조직하였다. 화랑도는 15세∼18세의 소년들로 이루어졌고, 약 3년 정도 수련기간을 거쳤다. 화랑도는 1명의 화랑을 중심으로 수천 내지 수백의 낭도로 구성되었으며, 도의를 연마하고 산천을 찾아다니며 심신을 수련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직접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 때 사다함도 화랑으로 많은 낭도들을 이끌게 되었다. 그의 나이 12세가 되었을 때 이미 검술에 능숙하였다고 하며, 사다함을 받들어 화랑이 되어 달라고 청하자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5대 화랑이 되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1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신라는 진흥왕 때 백제와 공동작전으로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회복하였으며, 그 후 백제군을 기습 공격하여 한강유역 전부를 독차지 하였다. 한편 낙동강 유역으로도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함안의 아라가야(阿羅加倻)와 창녕의 비화가야(非火加倻)를 복속하였으며, 백제와의 관산성 전투이후 고령의 대가야에 압력을 가해 복속국이나 다름없는 처지로 만들었다.
562년(진흥왕 23년) 대가야가 신라에 반기를 들자 진흥왕은 이사부를 보내어 이를 공격케 하였다. 당시 16세인 사다함도 이 전투에 참가하기를 소원하자 왕은 그가 너무 어려 허락하지 않았다. 사다함이 계속해서 출전을 소원하자 왕은 귀당(貴幢)의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원정군이 대가야 경계에 이르자 사다함은 원수인 이사부에게 자신이 선봉이 되기를 자청하였다. 이사부는 사다함이 아직 나이가 어려 선봉이 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사다함은 정병 5천을 거느리고 몰래 전단문으로 쳐들어갔다. 대가야군은 급작스러운 공격에 미처 방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크게 패하였다. 대가야군은 크게 두려워하며 항복하였고, 도설지왕과 왕비 등을 사로잡았다. 진흥왕은 사다함의 이러한 공적을 크게 높이 평가하여 가야인 300명을 노비로 내려 주었으나 이들을 모두 놓아주어 일반 백성으로 만들었다. 또한 많은 전지(田地)를 하사하였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다가 종국에는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고, 왕이 강권하자 자신은 척박한 땅만 받았다.
사다함은 자신의 부하 무관랑(武官郞)이 공적은 많으나 신분이 미천한 탓에 보답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죽음 매우 슬퍼한 나머지 사다함은 점점 수척해져서 7일 만에 17세의 나이로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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