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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4년 5월의 호국인물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4-05-09 조회수 2665
파일첨부 monthlyp2_2014050808245440.jpg

변안열 장군(邊安烈 將軍)
General Byun An-yeol
(1334 ∼ 1390)

고려 말의 무장으로 원주변씨(原州邊氏)의 시조이며 자는 충가(忠可), 호는 대은(大隱)이다. 아버지는 심양후를 지낸 변량(邊諒)이며 어머니는 판추밀원사 원의(元顗)의 딸이다. 변안열은 본래 원나라 심양(瀋陽)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1351년에는 원의 무과에 장원급제 하였으며, 관직은 형부상서까지 올랐다. 그의 가문은 본래 관향은 황주(黃州)로 일찍이 조부인 변순(邊順)이 1268년(원종 9) 원나라 사신 탈타아(脫朶兒)를 수행하여 심양으로 가서 장수로 있다가, 천호후(千戶侯)에 봉작됨으로써 심양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손자인 변안열은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배종하여 고려로 돌아오고, 공민왕으로부터 원주를 본관으로 하사받음으로써 원주변씨의 시조가 되었다.

변안열의 활약은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공민왕대(恭愍王代)에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홍건적의 침입이 있었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2차 침입 때 안주만호(安州萬戶)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을 격퇴함으로써 2등 공신에 책록되고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가 되었다. 이듬해에도 상원수 안우의 휘하에서 개경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추성보조공신(推誠輔祚功臣)으로 책봉되고 예의판서가 되었다. 이후 밀직부사ㆍ지밀직사사를 거쳐 판밀직사사가 되었으며, 1374년(공민왕 23) 부원수가 되어 최영(崔瑩)과 함께 제주의 몽골세력 목호(牧胡)를 정벌하고 돌아와서 지문하부사가 되었다. 뒤이어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었으며, 우왕의 즉위 직후 추충량절선위익찬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功臣)에 봉작되었다.

한편 왜구(倭寇)는 배를 타고 다니며 각지의 해안에 상륙하여 촌락을 습격하였다. 1376년(우왕 2) 왜구가 부령(扶寧)에 침입하자 변안열은 양광도ㆍ전라도 도지휘사 겸 조전원수(楊廣道全羅道都指揮使兼助戰元帥)가 되어 나세(羅世)ㆍ조사민(趙思敏)ㆍ유실(柳實) 등과 함께 왜구를 대파하였으며, 그 공로로 문하찬성사에 올랐다. 이후에도 왜구의 침입이 그치지 않고 더욱 심해지자 1380년(우왕 6) 양광전라경상도체찰사(楊廣全羅慶尙都體察使)에 임명되어 도순찰사 이성계(李成桂)를 보좌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적들이 험지에 자리잡고 버티자 죽음을 각오하고 산 위로 올라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자 모든 군사가 총공격을 가하여 일대격전을 벌여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두목으로 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이 물들어 6, 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하며,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고 병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적군이 아군보다 10배나 많았으나 겨우 70여 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 이처럼 운봉(雲峰)과 황산(荒山)에서 대승을 거두어, 그 공로로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었다. 뒤이어 1382년(우왕 8) 단양(丹陽)과 안동에 침입한 왜구를 한방언(韓邦彦)과 함께 격파하였다. 이때 왜구 80여 명을 죽이고, 말 200여 필을 노획하였으며 그 공로로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에 봉작되고 판삼사사(判三司使)가 되었다.

1389년(공양왕 1) 최영의 생질이며 대호군(大護軍)인 김저(金佇)가 우왕의 부탁을 받고 이성계를 죽이려다 발각되어 옥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변안열은 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여러 차례 상소로 인해 1390년 정월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했다. 향년 5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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