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호국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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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9월의 호국인물
작성자 전산부 등록일 2006-09-05 조회수 3954
파일첨부 2006_sep_ko.jpg

양규 장군은 고려시대 목종과 현종대에 형부낭중(刑部郎中)과 도순검사(都巡檢使)를 역임한 명장이었다.

993년의 1차 침략에 이어 1010년(현종 1년) 거란 성종이 이끄는 40만 병력이 2차로 침략을 감행하여 흥화진(興化鎭 평북 의주 남쪽)을 포위하자 양규 장군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완강히 저항하며 거란 대병력의 침공을 저지했다. 이에 거란군은 40만 병력 중 20만 병력을 통주(通州 평북 선천)로 남하시켜 강조(康兆)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부대를 격파한 후, 양규 장군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양규 장군은 오히려 병력 1,700명을 이끌고 곽주성을 공격해 적군 6,000여 명을 처치하고 성안에 있던 백성 7,000여 명을 구해냈다.

이듬해 거란군이 개경까지 진격한 뒤 고려의 철병요구를 받아들여 군사를 되돌리자 양규 장군은 여러 장수와 함께 무로대(無老代 의주 남쪽)에서 돌아가는 거란군을 습격하여 2,000여 명을 죽이고 포로로 끌려가던 3,000여 명의 고려 백성을 구했다. 또한 이수(梨樹), 여리참(餘里站), 석령(石嶺) 등지에서 기습작전으로 적병 7,000여 명을 사살하고 잡혀가는 백성 3만여 명을 구해내는 큰 전공을 세웠다. 이어 애전(艾田)에서도 적의 선봉을 공격하여 1,000명을 베었으나 예상외로 적군이 대부대로 공격해 오자 구주별장(龜州別將) 김숙흥(金叔興)과 더불어 결사항전하다 끝내 진중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후에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추증되었고 1019년 공신녹권(功臣錄券)이 내려졌으며 1024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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