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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월의 호국인물
작성자 전산부 등록일 2007-02-01 조회수 2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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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만춘 장군(생몰연대 미상)
7세기 중엽 당나라가 주변국들을 모두 복속시켜 중국 중심의 일원적 질서 구축을 기도했을 때 오직 고구려만이 당나라에 대항하고 있었다. 이에 당 태종은 전쟁의 명분으로 삼기 위해 당시 당과 우호관계에 있던 신라를 침범하지 말도록 권유했으나, 고구려가 이에 응하지 않자 645년(보장왕 4년) 대군을 직접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다.
개전 초 당의 주력부대는 개모성(蓋牟城), 비사성(卑沙城)에 이어 요동성(遼東城)과 백암성(白巖城)까지 승승장구하며 안시성으로 진공했다.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하이청(海城) 남동쪽에 위치한 안시성은 당시 인구 10만 명 정도의 고구려 영지로 요동지역 여러 성들을 방어하는데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에 고구려는 포위된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15만의 군사를 보내 당 군과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처럼 더 이상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당나라 대군과 일대 격전을 벌인 것이 안시성전투다. 당시 안시성주 양만춘 장군과 안시성민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하나로 뭉쳐 당 군에 완강히 저항했다. 당군은 60일간 밤낮을 쉬지 않고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 안시성보다 높은 토산(土山)을 쌓고 이를 발판으로 공격해 오는 등 하루에도 6~7회를 교전하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당군의 토산이 무너지자 양만춘 장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사 수백 명을 이끌고 기습적인 역습을 감행하여 토산을 점령, 전세를 역전시켰다. 고구려군의 거센 저항으로 안시성 공략이 실패한 가운데 당나라군은 일찍 시작되는 요동의 겨울을 맞아 추위와 기갈에 시달리다 안시성을 포위한 지 3개월 만에 치욕적인 패배를 인정하고 철군하였다. 양만춘 장군이 성 위에 올라 철군하는 당 군을 바라보자 당태종은 비록 적일지라도 성주의 영웅적인 투혼에 탄복하여 비단 100필을 보내 고구려에 대한 그의 충성을 기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후에도 당나라는 군사들을 재정비해 수차례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그때마다 고구려군은 이를 모두 물리쳤으며 안시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지 4년 뒤 당태종은 “다시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승을 떠났다.

고구려의 주력군이 모두 패퇴한 상황에서 안시성이라는 작은 성 하나만으로 대당전쟁의 승패를 짊어져야 했던 양만춘 장군은 목숨을 걸고 성민과 혼연일체가 되어 침략자를 막아냄으로써 고구려가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와 국운을 건 대전쟁에서 승리, 결과적으로 한반도를 지키는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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