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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08년 4월의 호국인물
작성자 전산부 등록일 2008-04-02 조회수 3255
파일첨부 2008033109244509.gif

최윤덕 장군은 1376년 경남 창원에서 지중추부사 최운해(崔雲海)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산에서 호랑이를 만나자 화살 하나로 쏘아 죽였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활을 잘 쏘았다.

대학자 권근 밑에서 학문을 닦고 1394년(태조 3) 19세에 무과 회시(會試)에 합격했으며, 21세 때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를 섬멸하는 등 아버지를 따라 여러 싸움에서 공을 세워 1400년 훈련원 부사직(副司直)에 제수되었다. 1402년 (태종 2) 낭장(郎將) 등을 거쳐 1403년 대호군(大護軍), 1406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使)로 승진하는 등 부친상 중에도 3년 시묘를 끝내지 못하고 왕의 부름을 받을 정도로 변방 방어에 있어 왕의 신임을 받았다.

1419년(세종 원년) 의정부 참찬(參贊)으로 삼군도절제사가 되어 출병 15일 만에 대마도를 정벌하여 하삼도에 창궐하던 왜구를 격퇴했으며 이후 공조판서, 평안도절제사,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국방에 온 힘을 기울였다.

1433년(세종 15년)에는 군사 1만 5천명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에 침입한 여진족을 물리치고 여연, 자성, 무창, 우예에 4군을 설치하였다. 그 공으로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1435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최윤덕 장군은 율곡의 십만양병설에 앞서 왜국의 침략을 예견할 만큼 뛰어난 장수였다. 장군은 세종에게 “일본이 지금은 저희들끼리 싸우고 있지만 정세가 통일되면 반드시 우리나라로 쳐들어올 것입니다. 부산 동래에 성을 쌓아 대비하소서”라고 했는데 과연 140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 동래성이 제일 먼저 함락되었다. 또한 북방정책에는 “만주 야인은 여러 힘이 하나로 뭉치면 무서운 세력으로 우리를 공격할 것이니 반드시 저희들끼리 싸우게 하여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으로 세력을 양분하여야 합니다.”라고 진언할 만큼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장군은 평소 나라가 평안할 때 전란에 대비해야 한다며 틈만 있으며 축성(築城)의 필요성을 왕께 진언하였고, 우의정과 좌의정의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연안과 변방으로 내려가 군사요충지에 성을 쌓는 등 축성대감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평생을 국방을 튼튼히 하는데 힘썼다.

또한 성품이 자애롭고 근검하여 고향인 창원에 내려갈 때는 언제나 말 한필에 종자 한 명만을 거느렸으며, 평안도 도절제사로 있을 때는 여가를 이용하여 관사 앞 묵은 땅에 농사를 지었을 만큼 근면하고 청렴했다. 이와 같은 우국충정과 인덕으로 무인의 신분이었지만 정승의 반열에 오를 때도 반대하는 관료가 없었다.

1445년(세종 27년)에 70세의 일기로 별세한 후,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통천의 상렬사(尙烈祠)와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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