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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08년 8월의 호국인물
작성자 전산부 등록일 2008-08-01 조회수 2983
파일첨부 2008073110245311.gif

이정암 의병장은 1541년 서울에서 사직서령 이 탕(李 宕)의 아들로 태어났다. 1558년(명종 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며 1561년(명종 16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기용된 후 공조좌랑, 예조좌랑, 전라도도사, 함경도도사, 정언(正言)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했다. 1571(선조 4년)년 예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이 된 후 춘추관의 직책을 겸하여『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도 참여했다.
1572년부터 연안부사, 장단부사, 양주목사를 역임하며 향교 등 교육기관을 세우고 번다한 역(役)을 없애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당시 조선 북부지방의 많은 수령들이 백성을 가혹하게 다스렸으나 이정암은 선정을 베풀어 믿고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이조참의로 재직 중이던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개성유수로 있던 동생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개성을 지키려 했으나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옛 부임지였던 황해도 연안(延安)으로 들어가 의병 5백명을 모집했으며 연안 부사 재임당시의 선정을 기억하는 백성들은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이정암 의병장은 해주로 진격하는 왜군을 막아내기로 결의, 성곽을 수리하고 군량을 모으는 한편 의병을 훈련시키고 성 요소요소에 화포를 설치하고 척후병을 보내 왜군의 동정을 살피는 등 전투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드디어 1592년 8월 28일 왜장 구로다 나까마시(黑田長政)가 이끄는 수천 명의 왜군이 성을 공격해 왔다. 왜군은 밤낮으로 병력을 교대해 가며 공성무기를 총동원해 공격해 왔으나 이정암 의병장과 의병군, 성민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결사항전했다.
결국 왜군은 5일 만에 엄청난 병력 손실만 입은 채 퇴각했고 이정암 의병장과 의병들은 이들을 추격하여 수많은 왜군을 사살하고 소와 말 90여 필, 군량미 130석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정암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패한 왜군은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연안성을 포함한 해서지방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이정암 의병장이 연안성 싸움에서 승리하여 해서지방을 지켜낸 덕분에 선조 임금이 머무르던 의주의 행재소와 충청도 전라도간의 교통로가 확보될 수 있었고 이 서해안 연락로를 통해 이순신 장군의 각종 승전장계, 기타 보고서 등이 무사히 전해져 전쟁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또한 한반도 북부지방의 곡창지대인 해서지방을 지켜낸 덕분에 7년이라는 오랜 전쟁기간 동안 극심했던 식량난도 다소나마 완화될 수 있었다.

난이 끝난 후에는 풍덕으로 낙향하여 시문(詩文)에 힘쓰다가 1600년 6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604년에 연안을 수비한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월천부원군으로 추봉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저서에『상례초(喪禮抄)』『독역고(讀易攷)』『왜변록(倭變錄)』『서정일록(西征日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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