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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월의 6·25 전쟁영웅- 김교수 대위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5-07-06 조회수 5986
파일첨부 korva_20150701_1.jpg

“아군의 시간을 사수한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7월의 6?25전쟁영웅은 1953년 7월 강화도 김화의 교암산지구 전투에서 1개 중대병력을 이끌고 중공군 연대병력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김교수 육군대위가 선정되었습니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김교수 대위는 흥남 공과대학을 수료한 후 월남하였고, 1951년 8월 18일, 육군 종합학교 제 32기 마지막 기수로 육군 소위에 임관되어 육군종합학교 출신다운 기개와 열정으로 전선을 누비며 큰 활약을 하였습니다.



 



 



 



휴전조인을 앞둔 1953년 7월



 



전쟁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우리 국군은 어서 빨리 전쟁이 끝나 집으로 돌아갈 날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은 ‘7?13공세’라는 대규모 공세를 펼쳐왔는데요. 강원도 김화군 원동면에 위치한 교암산의 금성 돌출부를 차지하기 위한 적의 최후 공세도 7·13공세 중 하나였습니다.



 



7월 13일 밤 9시 중공군은 교암산 전초에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교암산은 제 6사단 2연대 1대대가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요. 그 방어 능선에는 2대대가 3개 중대로 전초진지를 편성하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은 먼저 최전방에 있는 제 7중대에 공격을 가한 다음 1시간 후 2개 대대로 증강되었으며, 곧이어 김교수 대위가 지휘하던 제 6중대에서는 진내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적의 공격은 그 강도를 더해갔고, 적의 병력도 급속도로 늘어났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적이 김교수 대위가 지휘하던 제 6중대를 완전히 호위하게 되었고, 중대를 지휘하던 김교수 대위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 적에게 진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전 포병의 진내사격을 요청하는 한 편 중대원에게 동굴로 대피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후 아군 포병의 진내사격이 제6중대 진지인 ‘가’고지를 강습하였고, 제6중대가 포진한 능선에서는 전사상 유례가 드문 백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김교수 대위는 모든 중대원들에게 최후의 순간까지 한 치도 물러나지 말고 적을 무찌르도록 격려하며 전투를 진두지휘 했습니다. 적을 향해 몸소 수류탄을 투척하고, 총검을 휘두르며 진지를 사수하던 중 적으로부터 날아온 한 발의 총알에 복부를 맞았고 김교수 대위는 그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중대장의 전사로 위기에 빠진 중대원들은 김교수 대위의 뜻을 이어 7~8시간 이상 고군분투하며 전투를 이어갔지만 결국 적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대부분이 전사하였고, 단 6명만이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가’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벌어진 이 전투는 열악한 환경과 수많은 적을 상대로 8시간 이상을 사수하고 적 1천 200명을 사살하는 데에 혁혁한 전과를 올린 치열한 방어 전투였습니다.



 



지리적인 악조건과 인접부대의 방어선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진지를 사수함으로써 아군의 안전한 철수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고, 이 전투는 화천 방향으로 철수한 병력이 전열을 재정비한 후 반격을 감행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강원도 철원에 위치한 김교수 대위 추모비 출러:철원뉴스



 



정부에서는 중공군의 끊임없는 공격에 두려워하지 않고 혈전을 벌이다 전사한 김교수 대위의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엄청난 병력, 쉴 새 없는 공격,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대원들을 격려하며 끝까지 싸워 다른 부대가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확보했던 김교수 대위의 용기는 전 군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김교수 대위가 목숨을 걸고 싸웠던 7월을 맞아 김교수 대위의 용기를 가슴에 새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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