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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5년 10월의 6.25 전쟁영웅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5-10-02 조회수 6039
파일첨부 AKR20150930022800043_01_i.jpg



 



 



 



 





▲ 전구서 공군 소위 (출처: 대구신문)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정찰기를 탄 채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든 공군 조종사! 10월의 6·25전쟁영웅은 1950년 9월 영천지역 전투에서 맹활약한 전구서 공군 소위입니다.



 





 



 



1927년 2월 7일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태어난 전구서 소위는 1943년에 평양 제2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조종사의 꿈을 안은 채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게이오 육군비행학교에서 익힌 비행기 조종술을 바탕으로 현 대한민국항공회의 전신인 조선항공협회의 조종사로 활약했습니다.



 



 





▲ L-4 연락기 (출처: 문화재청)



 



1948년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으로부터 L-4 연락기 10대를 양도받아 육군 항공대를 설립했습니다. 전구서 소위는 1948년 9월 18일 항공병 제2기로 육군 항공에 입대했는데, 복무 중이던 1949년 10월에 공군이 육군으로부터 분리되면서 공군으로 소속을 전환하여 L-4 연락기를 조종했습니다.



 





▲ 6·25전쟁 초기 전황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기습적으로 38선을 침범하면서 6·25전쟁이 발발합니다. 북한은 기습공격 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7월 3일에는 한강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부지방에까지 진출합니다. 이에 대응해 국군과 유엔군은 부산을 거점으로 방어선을 구축하여 반격의 기회를 노리면서 낙동강 일대에 남북 간의 대치상태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급박한 전세 속에서 전구서 소위(당시 이등상사)는 L-4정찰비행부대 조종사로서 낙동강 방어선의 국군 제2군단에 파견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9월 5일 적진을 정찰하라는 명령을 받고 경주비행장을 이륙하여 영천 지역에 대한 공중정찰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시야가 불분명하고 적이 위장을 철저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중정찰로는 적정을 탐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 영천전투 전승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구서 소위는 보다 정확하게 정찰하고자 지상을 통해서 직접 적진에 접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공격 무기가 없는 정찰용 비행기를 타고도 적의 대공포화를 뚫고 적의 수중에 있던 영천비행장에 착륙을 감행했습니다. 영천 시내에 잠입한 그는 적의 부대 편성 상황을 확인하고 비행장으로 돌아가 적의 감시를 뚫고 유유히 이륙하여 아군기지로 향했습니다. 전구서 소위의 보고는 국군이 북한군의 공격을 막고 ‘영천지역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개시와 함께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반격을 감행하여 전세를 뒤집고 10월 초에는 38선을 넘어 진격합니다. 1950년 10월 7일 전구서 소위는 지상군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화천 일대를 정찰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적진 상공을 선회하면서 관측비행을 하던 중 전구서 소위는 적의 대공포 탄에 피격되어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장렬히 산화했습니다.



 



정부는 정찰기 조종사로서 지상군의 작전 수행에 공헌한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하고 공군 일등상사에서 소위로 1계급 특진을 추서했습니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을 향한 전구서 소위의 용기와 기상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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