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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04년 1월의 호국인물
작성자 전산부 등록일 2004-01-02 조회수 3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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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일 의병장 (1537.1.10 ~ 1593.6.29)
김천일 의병장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호는 건재 혹은 극념당, 시호는 충장(忠壯)이며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1573년 군기시주부(軍紀寺主簿)의 직위로 관직에 진출한 이후 용안현감, 강원도·경상도 도사, 사헌부지평, 담양부사, 한성부서윤, 수원부사 등 주요직위를 역임했다.
그러나 1589년 수원부사 재직 당시, 권세 있는 양반가의 탈세를 문제삼아 세금을 부과하였다가 이들의 모함으로 벼슬을 떠나 낙향해 지내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박광옥, 최경회 등과 함께 호남지역에서는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나주에서 의병 300명을 조직해 서울로 진군하던 김천일 의병부대는 진군 도중 전국 각처에서 모여든 의병으로 그 수가 수천을 헤아리게 되었다.
선생은 부사로 재임했던 적이 있어 지형을 잘 아는 수원을 거점으로 유격전을 전개, 첫 전투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어 강화도로 진을 옮겨 왜적을 섬멸했다.
강화도는 당시 의주로 피난가 있던 조정과 서울, 호남·호서지방을 잇는 전략상 요충지로서 선생의 공으로 의주 조정과의 연락이 재개되었다. 이러한 전공으로 선조가 선생에게 의병 총사령관인 '창의사(倡義使)'란 군호를 내리자 김천일 부대는 더욱 사기충천하여 왜적과의 전투마다 승리를 기록했다.

양천, 김포, 양화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수복, 개성진격 작전에 참여했으며 서울 수복시에는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군량미 1천석을 풀어 구휼에도 앞장섰다.
이후에도 사현전투,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해 큰 공적을 세우던 선생은 남하하는 왜군에 의해 진주성이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성이 무너지면 호남의 곡창지대가 왜군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는 걱정으로 급히 경남 진주성으로 의병을 이끌었다.
1593년 6월 14일, 관군보다 먼저 진주성에 입성한 김천일 부대는 이후 합세한 관군과 의병 등 3천의 병사로 왜군 10만 명과 9일 밤낮으로 100여 차례에 이르는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자 선생은 왜적의 칼날에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며 큰아들 상건과 함께 촉석루에서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
왜군은 진주성 싸움에 10만 대군을 동원할 정도로 총력을 기울였으나 김천일 의병장의 결사항전으로 수만 명의 피해를 입고 호남진출에 실패했다.

1월 8일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후손을 비롯한 종중과 유관 단체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 행사가 거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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