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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4년 9월의 호국인물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4-09-01 조회수 2944
파일첨부 9_SEPTEMBER.jpg

9월의 호국인물(護國人物) 

차일혁(車 一 赫) 경무관 

Superintendent General Cha Il-Hyuk 

(1920. 7. 7 ∼ 1958. 8. 9) 


故 차일혁 경무관은 1920년 7월 7일 전북 김제시 금산면 성계리에서 아버지 차유선, 어머니 김유순의 외동아들로 출생하였다. 흥성공업전수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6년 초 조선인 교사를 연행하던 일제 특별고등계 형사를 구타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지강(芝江) 김성수와의 인연으로 중국 중앙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1941년부터 조선의용대에서 항일유격전 활동을 펼치다가 광복 이후 남한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김성수, 이규창 등과 함께 악명 높았던 일본 경찰 사이가(齊加), 츠보이(坪井) 등을 저격하여 민족정기를 바로잡는데 앞장섰고 6·25전쟁 발발하자 ‘옹골연 유격대’를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싸웠다. 이 과정에서 인민군 보급차량을 습격 도중 입은 팔 부상으로 군에서 제대하였다.



유격전을 치루며 남다른 용맹함과 지략을 보여주었던 차일혁 경무관은 군과 지역 유지의 권유에 응하여 1950년 10월 전북경찰국 제18전투대대장(경감)에 투신하였다. 부족한 화력과 인원이었지만 전주시 완주군 구이면의 토벌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그는 1951년 1월, 정읍 칠보발전소 일대를 빨치산 2,500여명이 포위하자 전투경찰 75명을 이끌고 탈환작전에 임하였다. 턱없이 적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신출귀몰한 기만전술로 당시 유일한 남한의 발전소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여 호남과 충남일대에 전기를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하였다.

전북 장수, 정읍, 무주 등에서 빨치산토벌작전을 펼쳐 많은 공을 세운 그는 무주경찰서장, 임실경찰서장 등을 역임하였고 1953년 5월에는 서남지구전투경찰대 2연대장으로 취임, 그해 9월 18일 빨치산 남부군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하여 빨치산 토벌작전을 사실상 종료시켰다. 이후에도 충주경찰서장, 진해경찰서장, 공주경찰서장 등을 두루 역임하며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해내며 대한민국 경찰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러나 1958년 8월 안타깝게도 금강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였다.



차일혁 경무관은 이토록 강인하고 용맹한 경찰이기도 했지만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지켜낸 경찰이기도 했다. 1951년 5월 빨치산 토벌 작전의 일환으로 지리산 화엄사를 비롯한 사찰 및 암자의 소각 지시가 하달되자 차일혁 경무관은 사찰의 문짝만 태우면서도 작전의 목적을 달성하는 기지를 발휘하였다. 지휘관으로서 작전의 본질을 잘 간파하여 슬기롭게 문화유산을 지켜낸 것이다. “절 태우는 데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세우는 데는 천년도 부족하다”던 그의 말은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비면서도 문화와 문화재의 중요성을 인시했던 그의 학식과 품성을 짐작하게 한다. 고찰을 구한 공로로 정부는 2008년 10월 그에게 보관문화훈장을 수여했으며 시인 고은은 공덕시를 지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충주경찰서장 재직 시에는 불우청소년들을 모아 충주직업소년학원을 설립해 인재를 배출하기도 했다. 무주서장 당시 작전성공으로 부대에 내려진 포상금은 불우 이웃에 전액 기부하였고 참호용으로 지급된 자재는 얼어 죽어가는 주민들의 주택복구에 우선 지급했다. 이런 일화는 그의 됨됨이와 애민정신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기억된다.

차일혁 경무관의 공훈을 높이 평가하여 국가는 은성 충무무공훈장과 금성 화랑무공훈장, 대통령수장 등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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