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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6년 5월의 호국인물
작성자 관라자 등록일 2016-05-03 조회수 822
파일첨부 monthlyP_2016050315240401.jpg

5의 호국인물(護國人物)



신류 장군(申瀏 將軍)

General Shin Ryu

(1619(광해군 11)~1680(숙종 6))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1619년(광해군 11) 경상도 인동(仁同)(현재 경북 칠곡)에서 신우덕(申祐德)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력이 뛰어나고 기상이 남달리 출중하여 약관(弱冠)의 나이에 이미 경사(經史)에 능통하였으며, 1645년(인조 23)에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에 나갔다. 1648년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며 1650년에는 비변사 낭청직을 겸임하였다. 1652년 사과(司果)로 비변사낭청(備邊司?廳)과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이 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흑룡강(黑龍江) 방면의 자원을 탐내어 그 부근에 성을 쌓고 모피를 수집하는 등 약탈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군사를 보내 공격, 축출을 시도하였으나 구식 장비로 총포를 가진 러시아군을 당하지 못해 번번이 패배하였다. 청나라는 조선 조총군의 위력을 익히 잘 알고 있어 조선의 조총군을 요구하였다. 이 요청에 의해 1654년(효종5) 조총군사 100명을 뽑아 파견하여 제1차 나선(러시아)정벌이 이루어졌다. 조?청 연합군의 제1차 나선정벌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러시아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힌 것이 아니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더 강력해진 군세로 청군을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에 청은 재차 파병을 요청하였으며, 효종은 제1차 파병 때와 마찬가지로 파병을 추진하게 하였다. 1658년(효종9) 함경도 병마우후(兵馬虞侯, 종3품)로 있던 신류 장군은 영병장(領兵將)의 임무가 주어져 출병하였다. 총 265명으로 구성된 조선군은 같은 해 5월 1일과 2일에 걸쳐 회령(會寧)에서 두만강을 도하한 뒤 화룡-연길-왕청을 경유하여 북상했으며, 5월 9일에 이르러서 청군과 합류하였다. 6월 3일부터는 출격준비 작업이 이루어져 200명의 포수들을 25명 단위로 나누어 8개 부대로 배속하고, 이를 다시 5명씩 분산시켜 승선시켰다. 6월 5일 의란(依蘭)에서 출항한 조?청 연합군은 10일 저녁에 흑룡강 중앙에서 러시아 함대 11척과 조우하면서 전투가 개시되었다. 러시아의 스테파노프선대 11척 가운데 10여 척을 화공으로 불태우고 적장과 병사들을 괴멸시켰다.

전투가 끝난 후 청군은 러시아와의 지속적인 대치를 이유로 조선군에게 영고탑으로 복귀할 것을 지시했으나, 신류 장군은 귀국을 희망하는 병력들을 강제로 주둔시킬 경우 각종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청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청군 역시 조선군의 복귀를 허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만강을 건너 8월 27일에 회령으로 돌아오면서 제2차 나선정벌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신류 장군이 지휘했던 제2차 나선정벌로 흑룡강 방면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군사의 주력이 거의 섬멸되었다. 이는 효종 즉위 후부터 준비해왔던 북벌계획을 간접적으로 실현한 것이었다. 신류 장군은 상대적으로 적은 군사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전술로 큰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신류 장군은 1658(효종9)년 나선정벌에서 세운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평안도 선천부사(宣川府使)에 임명되었다. 1661년(현종 2) 경상좌수사에 제수되었으며, 1666년(현종 7) 용양위 부호군으로 다시 관직에 나갔다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한직인 동지중추부사로 옮겼다. 이후 경상도 김해부사를 지내고 1669년(현종 10) 경상좌도병마절도사, 1674년(현종 15)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내면서 선정을 펼쳤고 이듬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677년(숙종 3) 포도대장에 임명되었다가 1679년(숙종 5) 영의정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파직되자 낙향하였으며, 이듬해 1680년(숙종 6) 1월 15일 향년 61세로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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