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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04년 2월의 호국인물
작성자 전산부 등록일 2004-02-02 조회수 4385
파일첨부 20040128105205251.jpg

최규식 경찰경무관 (1931. 7. 23 ∼ 1968. 1. 21)
전쟁기념관(館長 朴益淳)은 1968년 북한 124군부대의 ‘1·21 청와대 기습사건’ 당시 목숨을 바쳐 적의 침투를 저지한 최규식(崔圭植) 경찰경무관을 2004년 2월의 호국인물로 선정, 발표했다.

최규식 경무관은 193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춘천 고등학교 졸업 후 1949년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육군종합학교에 입교하여 1951년 9월 소위로 임관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제8사단 50포병대대에 관측장교로 보직된 그는 강원도 인제 노전평 전투와 백석산 전투에 참가하여 수많은 공적을 세웠고, 1952년 4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전쟁 이후 1954년 도미(渡美)하여 미육군 포병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귀국 후 포병학교 사병교육대 포대장·작전과장 등을 거쳐 21사단 167포병대대 부대대장으로 재임하던 중 1961년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요원으로 선발되어 충북도경 정보과장을 거쳐 1963년 12월 전역했다.

전역 후 경찰 총경으로 임용된 그는 부산시경 정보과장, 서울 용산경찰서장 등을 역임했으며, 1967년부터 종로경찰서장으로 근무하던 중 북한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폭파하고 대통령을 암살할 목적으로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한 ‘1·21사태’를 맞았다.
1968년 1월 21일 밤 22시경 종로경찰서 순찰차로부터 'CIC대원이라는 거동수상자 30여명이 세검정에서 자하문 쪽으로 행진하고 있는데 검문에 응하지 않는다.’ 는 보고를 받고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한 최서장은 즉시 기동 타격대의 출동을 지시하고 현장으로 급히 달려갔다. 당시 공비가 침투했던 지역은 청와대와 직선거리로 3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최규식 서장은 검문에 불응하며 자신들을 훈련에서 돌아오는 CIC부대원이라고 우기는 무장공비를 가로막고 신분을 추궁하면서 체포를 지시하는 순간, 무장공비들의 선제사격을 받았다. 갑작스런 공격으로 왼쪽 가슴에 세 발의 총을 맞고도 그대로 선 채 응사하면서 부하들을 지휘하던 최서장은 결국 현장에서 쓰러졌으며 병원 이송 중 운명했다.
이후 무장공비들은 군경합동작전으로 김신조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되었다.
정부는 북한 특수부대원과 치열한 교전 끝에 청와대 진입을 막는 결정적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전사한 고인의 전공을 기려 경무관으로 1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으며, 동료 경찰관들은 그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가 쓰러진 청운동 자하문 고개와 경찰종합학교 교정에 동상을 건립하여 그의 투철한 사명감과 호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2월 5일(목 14:00)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는 유족과 경찰 선후배를 비롯, 경찰청장, 경찰대학장, 경우회장, 참전경찰유공자회장 등 유관단체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행사가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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