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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1운동 제98주년을 맞지만 가슴치며 눈물 흘리는 후손이 있다.
작성자 정병기 등록일 2017-02-19 조회수 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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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제98주년을 맞지만 가슴치며 눈물 흘리는 후손이 있다.

 

광복 72주년인이 되는 해인데..? 항일독립운동가 후손 정용선 선생의 증손자 40년째 ''고투''

증손자 지난 40년간 정용선 선생 관련 자료발굴을 위해 전국을 동분선주 반평생 받쳤다.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마포 공덕동 서울서부지방법원. 검찰청)에서 옥사한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40년째 지루하고 고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정병기(60). 오늘도 역사의 현장이자 한이 맺힌 옛 마포 경성형무소 자리에 흰 국화꽃 몇 송이를 받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고 마음이 아프고 저리다. 재산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선조의 나라위해 받친 그 명예를 찾아 바로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는 자손 된 도리를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후손들은 아직도 진정한 독립운동이 끝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정용선 선생의 증손자는 3.1운동 제98주년이자 광복 72주년인 올해도 어김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다.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단서만 있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어느 곳이든 달려간다. 부양할 가족도 있고 몸도 성치 않지만 나라를 되찾는 일이 우선이라며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증조부와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을 조상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만 둘 수 없다. 정말 지나고 지난날을 돌이켜 보니 나라를 위해 애국하면 후손들은 개고생이라는 사실이 산 경험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우선 배움의 길에서 멀어지고 가난을 달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증손자는 아버지와 친척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증조부인 정용선(1883년생 ~ 1928.5.20. 옥사) 선생은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 청량산 자락 산골 척곡교회를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그 군자금은 마주 간도로 전해져 독립자금으로 사용되어졌다고 한다. 척곡교회는 (1907년 세워진 민족교회) 특별한 사연이 있는 교회이다. 현재는 기독교문화재로 지정되어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척곡교회 김영성(94)장로님에 따르면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위험천만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그의 증조부는 1916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10년 가까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 날아왔다고 한다. 후손들이 하나도 없는 줄로 알았지만 그래도 그 뿌리가 있다는 놀라울 따름이라고 척곡교회 김종숙 초대목사의 손자이신 김영성 장로님은 말하신다. 살아생전 혹시라도 정용선 선생의 후손들이 있다거나 찾아오면 보살펴 주라는 유언을 하셨다고 한다. 그분이 체포 투옥되어서 일체의 군자금내역이나 동지를 발설하지 않고 단독행위로 한 것으로 입을 굳게 닫고 의지와 절개를 지키다 결국 형무소에서 숨졌기에 교회가 온전하게 지켜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당시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경성형무소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졌다는 것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됐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일제는 당시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하신 정용선 선생의 시신도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지 않는 만행을 저질렀다. 시신을 돌려주게 되면 장례를 치루며 다시 항일독립세력들이 결집하다고 원천봉쇄하기 위해 시신을 훼손하여 버렸던 것이다. 당시 일제의 치밀한 감시와 탄압은 참기 어렵고 살기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또 증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일가친척들이 증조부 이름을 족보에서 파버렸고 증조부가 실종된 후 일제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가족들이 나서서 증조모를 개가시켰다는 사실은 독립운동을 했음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정황증거라고 강조했다. 실제 호적등본을 보면 증조모는 독립투사의 아내였던 것을 감추기 위해 본명인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개명까지 했다. 결국 일제의 치밀한 감시와 조사로 밝혀져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가 만든 호적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 외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서류는 남아있지 않다. 정부의 자료관리 부실과 역사의식 부재로 인한 페기와 소각 그리고 6.25전쟁의 피해라고 한다. 또 친일파들의 의한 고의적인 자료 파괴도 문제라고 본다.

 

국가보훈처는 물론 국가권익위원회 청와대에까지 서류를 안 내밀어 본 곳이 없지만 객관적인 입증자료가 없어 독립유공자로 선정할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그는 국내에서 안 되면 외국에서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에 1993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띄워 수형인 명부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주고 사오기도 했다. 일본 외무성에 수차례 서신을 띄우기도 했지만 안타깝게 결정적인 사료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지난해엔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까지 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미발굴독립유공자 특별위원회라도 설치해야 하는 현실이다.

 

증손자는 일제시대 형무소 수형인 기록을 지난 8012월 실수로 모두 불살라버렸던 정부가 이제 와서 독립운동으로 수감됐다는 걸 증명할 문서를 가져와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준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더욱이 일본 외무성은 1995년까지 조선인 수형인 명부를 보관했지만 우리 정부는 단 한번도 그 서류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지난 정권들의 조직적인 역사자료 소각폐기가 관보로 지시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부 정덕수 할아버지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기 위해 법전면 풍정리 금정광업소에서 일하다 일찍이 젊어서 폐병으로 숨졌다. 증손자 자신은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지난 1980년 강도살인범을 현장에서 붙잡고 부상을 당했다. 당시 후유증에 간경화로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다가 지금은 간암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증보부의 독립정신과 피가 흐르고 있다는 증거라고 본다. 또다시 서훈을 신청하여 이번 국가보훈처에 거는 공적심사에 밤잠을 못 이루고 기다리고 있는 심정이다.

 

증손자 정병기는 독립운동가를 찾는 일을 후손들에게만 떠넘기는 정부가 야속하지만 어디엔가 분명히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있을 거라 믿는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이제라도 정부가 나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제강점기 목숨을 받친 고귀하고 숭고한 희생을 잊어지고 잃어버린 애국으로 방치하지 말고 관련자료 발굴은 물론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그 명에를 찾아줘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정부가 할 일이고 당연지사가 아닌가 싶다. 나라사랑이나 애국은 말이나 구호가 아닌 실천이 우선되어져야 하지만 그 뒤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정부가 국가가 맡아서 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98주년 3.1절을 맞아 민족정신을 본받고 교훈삼아 민족정체성을 되찾고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되기를 아울러 바란다. 글쓴이/ 정병기< 미발굴독립유공자 정용선 선생의 증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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