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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해외 파병 후 전역한 분들께
작성자 김철수 등록일 2017-10-28 조회수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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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해외 파병 후 전역한 장병들에게

 

안녕하십니까? 대한해외참전전우회 창원시지회 사무국장입니다.

본 창원시전우회는 월남전에 참전한 989명의 전우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또한 진해 소죽도의 매립지 평화공원2008414일에 웅장한 해외참전기념탑

건립하여 본회에서 관리(보훈처 관리번호 : 42-2-51)하고 있습니다.

회원 모두는 7(古稀)이 넘어 젊은 전우들의 참여를 고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무국장 김철수 055-545-1625 017-545-1663

 

제목 : 대한민국 해외파병역사

세계 평화 정의 수호

1 레바논 - 동명부대

2 UAE - 아크부대

3 아프칸 - 오쉬노부대

4 필리핀 - 아라우부대

5 소말리아해 - 청해부대

6 남수단 - 한빛부대

7 미중부사 - 협조

8 아이티 - 안정화임무단

9 서부사하라 - 선거감시단

10 리아베리아 - 임무단

11 코트디브아르 - 임무단

12 수단 다프로 - 임무단

13 바레인 - 연합해군사

14 ,- 정전감사단

 

해외 파병의 역사

한국의 파병은 타율적 강요에 의한 파병 뿐 아니라 국익증진을 위해 자율적으로 행한 파병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의 해외파병 사례를 살펴본다.

 

고려 : 몽골과의 일본 원정군 파병

 

몽골과 강압적으로 수교했던 고려는 원의 부마국(駙馬國)으로서 13세기 후반 2번의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시 파병을 지원했다.

 

1274년 몽골군의 1차 일본원정에 전투병 8000명 및 지원인력 6700명을 파병, 전선 900척을 투입했으며, 1281년 제2차 원정시 전투병 1만명과 지원인력 15000, 전함 900척을 지원했다.

 

이 뿐 아니라 고려는 국내에 들어온 외국군의 군수지원도 해야했는데, 그 인원은 자그마치 125000, 215000명에 달했다.

 

조선 : 명나라 요청에 의한 여진·후금 정벌군 파병

 

고려와 달리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였던 조선은 당시 몽골족의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치하고 있었던 명()나라와 정치·외교적으로 동반자적 관계를 가졌다.

 

임진왜란시 군대를 파견, 조선을 도운바 있는 명나라는 1460(세조 통치시기) 두만강 주변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압록강 대안지역 토벌을 계획하면서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고, 조선군 1만명이 1467년 출병했다.

 

성종 때도 명의 건주 여진 정벌을 위한 파병요청을 받아 조선군 1만명이 파병되었으나 압록강이 얼지않아 되돌아왔다. 이후 명과의 관계유지를 위해서 변방 수비부대 3000명을 재파병했다.

 

세조, 성종 때 중국으로 파병한 조선군은 여진 근거지 후방에서 단독으로 정벌을 수행했는데 이는 고려시대 파병이 연합군의 형태 이루어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편 광해군 시기에도 명의 요청에 따라 161913000의 조선군이 만주로 파병된 바 있다.

 

베트남전 파병

 

한국 역사상 최장기간, 최대 규모의 해외파병은 1964년 박정희 정권 하 있었던 베트남(월남) 파병이다. 베트남전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면서 시작되어 1975년까지 11년간 계속되었다.

 

한국에서는 이동 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의 파견을 시작으로 전투부대가 파병되었으며, 전쟁이 장기화되자 미국은 1965년 한국에 추가 파병을 요청했고 박정희대통령은 야당 등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6년까지 맹호, 청룡, 백마부대 등 3개 사단의 파병을 강행했다.

 

1973년 철수 완료 때까지 8년 반 동안 육··공군 연인원 325,517명이 참전했으며 주둔 병력은 2만여 명이었다. 전사망자 수는 5,099, 부상자수는 11,232명으로 집계되었다.

 

* 파병이 정점에 올랐던 1968년에는 약 5만여명의 한국군이 파병, 55만명의 파병 규모의 미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을 투입 참전 후 고엽제 판장을 받은 사람은 12천명, 후유의증 판정을 받은 사람이 3만 명이다.

 

베트남 파병은 6.25 이후 무너졌던 한국 경제를 부흥시키는 데 크게 작용했다. 정부가 20058월 공개한 베트남전 외교문서에 따르면, 베트남(월남) 파병으로 인한 19651969년 사이 한국의 이득은 54600만달러로 밝혀진 바 있다.

 

한편 미군은 연인원으로 260만 명, 최대 549500명이 파병되었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지 2년 후 138000명의 인원이 유지되고 있음을 감안해 보면 실로 많은 병력의 투입이 있었던 셈이다.

 

걸프전 파병

 

베트남전 이후의 해외파병은 19908월에 발발했던 걸프전 때도 있었다. 쿠웨이트 침공을 실시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무력 합병하자 유엔은 이라크에 대한 제재 조치를 단행했으며, 동시에 미국은 당시 유엔 회원국도 아닌 한국측에게 파병을 요청 했다.

이에 우리 정부는 1991년 의료지원단 154명과 공군수송단 169명을 각각 사우디아라비아 및 아랍에미리트연합에 다국적군'으로 2개월간 파병했다.

 

유엔평화유지활동차원의 해외파병

 

19919월 남한은 북한과 동시에 유엔의 정식 회원국되면서 우리 국군의 대외파병은 평화유지활동(PKO)에 참여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즉 유엔회원국이 되자 UN은 한국에 평화유지활동(PKO) 활동에 대한 참여를 제의했고, 한국정부는 19929PKO에 참여 의사를 통보, 소말리아를 시작으로 세계 여러 분쟁지역에서 평화유지활동 차원의 해외파병이 본격화되었다.

 

20068월 현재 우리군은 동티모르와 그루지아, 인도와 파키스탄 분쟁지역인 카슈미르, 서부 사하라 등 5군데서 UN평화유지군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라크 파병

 

20033월 이라크전이 발발하자 한국은 4월 말 이라크로 국군 서희·제마부대 1진을 파병했다. 5월 종전을 선언한 미국은 한국측에는 추가파병을 요청했고 국내에서 조차 파병반대에 대한 여론이 거셌지만 정부는 이라크 추가파병 방침 결정했다. 20048월 선발대 출국을 시작으로 단계적 파병이 이루졌으며 주둔지는 이라크 북부 아르빌'(쿠르드 족의 자치구역내).

 

200611월 정부는 자이툰 부대 규모를 현재의 절반 수준(1200여명)으로 줄이고 파병기한을 1년 더 연장키로 방침을 정했다. 이에 따라 유엔측 요청에 따라 350여명으로 구성된 국군 부대를 레바논평화유지군에 파견하도록 하는 내용의 `레바논파병동의안'20061215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통과되었다.

 

200611월 현재 자이툰 부대에 주둔 중인 인원은 약 2300여명이다.

 

< 참고> 파병지원받은 역사 - 일본의 백제 파병

 

역사적으로 우리가 해외파병을 한 경우 뿐 아니라, 우리에게 해외파병을 지원한 경우도 있었다. 663년 백제부흥군이 나당 연합군과전투시 일본이 백제부흥세력을 지원한 것이다.

 

백제는 66013만 나당연합군(신라와 당의 연합)의 침공으로 멸망하자 이후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해 '백제부흥국'(수도:주류성)을 다시 세웠고, 이에 신라와 당이 나당연합군을 다시 결성해 백제부흥세력과 한반도 서남해 백강(현재 전북부안 동진강)에서 '백강구 전투'가 일어났다(663). 이때 일본은 백제부흥군을 위해 전함 1,000척과 병력 27천명을 백제에 파병하는 등 대규모 파병을 지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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