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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6년 3월의 호국인물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3-02 조회수 5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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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호국인물

남만주의 三天, 대한통의부 의용군 사령관



신팔균(申八均) 독립운동가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Shin, Pal-gyun

(1882. 5. 19 ~ 1924. 7. 2)



1882년 5월 서울 정동에서 부친 신석희(申奭熙)와 모친 박씨 사이의 세 아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신헌(申櫶)은 삼도수군통제사,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守護條規, 강화도조약) 당시에는 전권대신을 맡은 당대의 대표적 무인관리였으며 부친 신석희 또한 병마절도사와 포도대장을 거쳐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이같이 한말 대표적 무반가문에서 나고 자란 선생은 1900년 10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에 들어섰으며 1902년 7월 육군 참위로 임관한 이래 1907년 7월 군대해산 직후까지 황실의 경호를 맡으며 최후의 대한제국 군인으로 복무하였다.

1909년 8월, 이미 유명무실해진 군을 등지고 낙향하여 동생 필균(必均)과 함께 충북 진천군(鎭川郡) 이곡면(梨谷面) 노곡리(老谷里)에서 보명학교(普明學校)를 열어 교사로서 교육구국운동을 펼쳐나갔다. 이 시기에 선생은 1909년 신민회 청년들이 만든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당(단)에 가입하여 구국의 신사상과 방략을 교류하는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09년 신년오찬에 순종으로부터 직접 참석요청을 받을만큼 유망한 가문의 자제로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구국운동을 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보명학교 등의 운영에 가산이 소진되자 누대로 내려오던 진천군 평산 신씨 고택을 저당잡히면서까지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등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이어나가고자 하였다.

망명 후 선생은 서간도와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길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며 또한 독립군의 공급처 역할을 한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이청천(李靑天), 김경천(金敬天) 장군과 함께 ‘남만주의 삼천(三天, 선생의 호가 동천(東天)이다)’이라는 위명을 떨쳤는데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1920년대 들어 북경으로 근거지를 옮겨서는 이세영(李世榮) 등과 한교교육회(韓僑敎育會)를 결성하여 한인들의 교육과 자치를 위한 활동을 펼쳤다. 여기서 선생은 간도참변으로 부모를 잃은 어린 고아들과 일반 한인 자제들을 모아 집의학교(執義學校)를 세워 교육시켰다.

더불어 1923년 9월에는 북경한인구락부(北京韓人俱樂部), 1924년 7월 북경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를 조직하는 등 북경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같은 연으로 1923년 개최된 국민대표회의 때에는 창조파를 이끈 북경군사통일회를 주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창조파 측은 임시정부의 외교론과 실력양성노선을 비판하고 무장단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새로운 영도기관을 만들고자 하였다. 대표회의의 결렬 이후 창조파가 수립한 국민위원회에서 선생은 5개 군구(軍區)를 맡아 둔전제(屯田制)에 입각한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는데 그가 지휘한 군구의 사령관으로는 김경천(金敬天), 최진동(崔振東), 안무(安武), 별동대장은 임병극(林炳極), 최준형(崔俊衡)이 맡았을 정도이니 무장독립운동계에서 선생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그와 같았다.

한편 1920년대 서간도 일대에는 무장투쟁 조직이 통합되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라는 이름을 내걸고 독립운동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열악한 기반 위에 조성된 데다 일제의 탄압, 복벽주의와 공화주의간의 대립으로 조직의 재정비가 시급히 요구되고 있었다. 이에 대한통의부 지휘부는 1924년 1월 8일 중앙의원회를 개최하고 ‘북경 군사학의 태두로서 경모(敬慕)의 지위를 받고 있던’ 신팔균 선생에게 위원장 자리를 제안하였다.

선생은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과 의용대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잔여병력과 모병 인원을 모아 의용대를 5개 중대로 재편하고 각 중대별로 인원을 선별, 사관양성소 격의 ‘사관학원’을 개설해 직접 훈련을 지휘하였다. 일제 측 자료에 의하면 ‘신팔균의 참여로 대한통의부가 독립단 중 제 1위의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대한통의부를 재정비하여 서간도 무장투쟁의 선봉으로 키워내려던 선생의 높은 뜻은 1924년 7월 2일 홍경현 이도구의 산악지대에서 중국 관헌의 사주를 받은 중국군의 습격을 받아 순국함으로써 끝내 이뤄지지 못하였다.

선생은 대한제국 최고 무반 가문의 후예로 태어나 식민지 치하일망정 개인의 영달이 보장된 시대적 환경에 영합하지 않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다. 선생의 삶은 대한제국 마지막 군인 중 한명으로 절개를 굽히지 않고 만주로 건너가 당시 무장투장계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을 총 지휘하였던 위대한 무장투쟁가의 삶이자 대한제국의 군대와 만주의 독립군 사이를 잇는 역사적 연결고리이기도 하였다. 간도참변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품은 애민의 교육가이자 독립군 장교들을 가르친 군사학의 거두였던 선생의 높고 곧은 뜻은 오늘날까지도 대한민국의 역사에 살아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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